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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운의 <Windows> - 프레임의 안과 밖, 그리고 사이

윤병운 작가는 그동안 기억과 환영 등의 문제를 다루며 데페이즈망 기법을 엿볼 수 있는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그려왔다. 그러나 그가 사용해온 작품 속의 소재들은 어떤 특정 상징이나 이미지를 갖지 않으며, 작가 자신의 기억에 대한 강약을 조절함으로써 사유나 감성으로는 온전히 메울 수 없는 여백을 갖도록 한다. 이와 같은 빈 공간은 하나의 사건이나 대상을 불러내는 기억의 시간이 지니는 간극만큼이나 재현으로 채울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으며, 윤병운의 작품들 속에 형성된 이미지들을 대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어떤 정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 그리고 이미지로부터 발생하는 그러한 정감과, 한데 모여 비로소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키기 위해 작은 캔버스들을 배열하는 철저한 기획 사이의 모순적 공존이 최근의 신작 <Windows> 시리즈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윤병운의 작품들은 그러한 시간의 입자를 나타내듯이 여름의 풍경으로부터 눈 내리는 겨울의 풍경으로 바뀌었고, 그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들은 풍경을 재현한 듯 보이지만 구체적인 지시대상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실내 공간에서 내다보는 풍경처럼 아늑한 정감을 자아내지만 창틀을 암시하는 캔버스들의 사이 공간에 의해 이내 안과 밖의 공간 감각을 혼동하게 되는 낯선 경험의 모순적 공존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와 더불어, 그 프레임들이 풍경의 이미지를 가리고 분할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파편화된 풍경을 한데 모아주면서도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실제 공간의 간극이 존재하는 ‘사이’ 또는 ‘틈’에서도 모순 혹은 이분법적 구분의 경계 허물기가 발생한다.
마치 실제 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정교하게 사생한 실외의 이미지들은 작가의 수공적 노력을 헛되게 만들기라도 하듯이, 작은 붓의 미세한 흩뿌림을 통해 묘사된 눈발에 가려지며 흐릿한 풍경으로 변화되어 아련한 정감을 자아낸다. 서구의 풍경화가 예술의 본격적 주제가 되었던 것은 프랑스에서 발현한 19세기의 인상주의에서 외광의 화려한 색채 구현을 이루면서부터였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17세기의 네덜란드에서는 북유럽의 음산하고 을씨년스런 기후 속에서, 일 년 중 얼마 안 되는 아름다운 날씨의 풍경들을 겨울 동안 벽난로의 훈훈한 기운 옆에서 이미지를 통해서라도 누리고자 했던 소망의 구현으로서 회화 예술의 한 가지 주요한 장르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낭만주의에서의 풍경화는 특히 독일에서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감성을 ‘숭고’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장르를 이루었다. 외부 대상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재현하는 태도는 유럽에서도 지역이나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연구들은 20세기 초반부터 독일 학계를 중심으로 진행돼왔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주요한 예술양식으로 떠오른 독일표현주의를 옹호하고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 보링어(Wilhelm Worringer, 1881-1965)가 저술했던 저서 『추상과 감정이입(Abstraktion und Einfühlung)』(1908)은, 예술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여타의 인문학과 결합하여 진행되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려 민족학의 관점으로 해석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외부 자연과의 친화관계에 있었던 라틴 민족은 자연에 대한 감정이입의 충동을 가지고 충실한 사실적 재현을 해왔고, 이에 반해 혹독한 자연과 마주하며 이를 극복하거나 외면하려고 해왔던 게르만 민족은 인간의 내적 표현을 중시하는 추상충동을 통해 예술을 구현해왔다고 한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발생했던 독자적 장르로서의 풍경화는 구현 방식에 있어서는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재생된 르네상스의 사생적 묘사를 따르고 있지만, 그 동인에 있어서는 외부 자연을 대결 구도가 아닌, 안락함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전이가 일어난다. 따라서 마치 인테리어와 같은 역할을 하는 17세기의 네덜란드식 풍경화는 안락함과 친숙함의 정서를 느끼게 해주며, 윤병운의 <Windows>를 바라보며 관객이 느끼는 정감은 이와 유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윤병운의 작품에서는 그 친숙함 혹은 안도감이 이내 어떤 낯설음이나 어색함으로 변모하여 다가오게 됨을 느낄 수도 있다. 그것은 재현된, 혹은 형상화된 이미지 대상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적 틀에 의해 발생된다.
전시장에 (‘평면적으로’ 늘어놓아) ‘설치’된 윤병운의 작품은 멀리서 볼 때 마치 거대한 단일 캔버스의 화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치밀하게 계산되고 의도된 이미지들을 조각조각 담고 있는 작은 캔버스의 단편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된 조합물이다. 우리는 여기서 평범한 듯 보이는 평면회화로부터 새로운 재현의 방식과 공간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창문이라고 하는 대상이 기능하는 문제와 더불어 회화 자체에서 중심을 이루는 캔버스와 그 프레임의 문제이다. 시각 경험의 첫 단계에서는 한편으로 창문 밖의 실외 풍경이 관람자에게 안도감과 안락함을 통한 일종의 정감을 제공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여기서 창틀로 보이는 격자무늬는 창밖의 건너편에 보이는, 실제로는 파편화되어 다시 일정하게 조합되어 늘어선 캔버스들 안에 묘사된 가옥의 창틀의 형태나 창문의 숫자와 동일하게 구성되는 치밀함을 갖추고 있다. 서로 절단된 파편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종합해서 바라보려는 습성은 일종의 착시로서, 형태를 인지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연구했던 게슈탈트 심리학의 접근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그동안 회화 작품을 대할 때 화면 내에서 완결되는 내용이나 이미지만을 강조하며 등한시했던 캔버스의 프레임 혹은 액자의 문제이다. 데리다는 『회화의 진리(Truth in Painting)』(1987)란 저서에서 이 문제에 관한 논의를 시도하는데, 주체 혹은 주제를 말하는 ‘ergon’에 대해 언저리 혹은 주변을 말하는 ‘parergon’을 부각시키며 그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예시한다. 이것은 중심과 주변, 또는 주체와 타자 등의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철학적 재고를 던져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서 변화되어 온 전시 방식이나 회화 매체인 캔버스가 가지는 공간 구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윤병운의 <Windows> 시리즈가 회화에 대한 데리다의 사유와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리즈는 건물과 옥외의 장소를 공간적으로 구분하고 신체적·물리적으로 분리시키는 벽의 일부에 하나의 틈새처럼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 두 공간이 시각적으로는 창문을 통해 여전히 분리되지 않고 연속되어 있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즉 윤병운의 ‘window'는 창밖 풍경과 시선을 던지는 내부 공간의 대조를 상상하게 하면서도, 화면 속에 구현된 외부대상과 실제의 공간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이중적이면서 모순적이기도 한 상황을 연출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창문은 화면(캔버스)의 안과 밖, 본체와 가장자리 혹은 주변부로서의 틀에 대한 구분을 회화 예술에서 재고하게 만든다. 이번에 보여주는 윤병운의 전시는 예술에 대한 그의 직관적 인식의 영역이, 그동안의 변화와 같이 어느 지점까지 변화하고 다다르게 될지 많은 기대를 걸게 한다.

- 장원 (미술평론가)



작가노트(2014.12)
Full of emptiness /텅빈기표

빛을 머금은 흰 눈은 내리고, 반대편 세상에 내가 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나는 응시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 빈 공간을
저 건너편에는 시간의 농도를 거스르는 과거가 보이고
허무함은 공간을 채우다 못해 쌓인다.
나의 시선은 당신의 눈을 통해 창앞에 서 있고

나와 너, 안과 밖, 공간과 물질, 의식과 무의식, 여기와 거기, 등 다차원의 경계에서 모호한 만남을 제안한다.

나에게 그리기란 그 행위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세웠다 지우는 영원한 회귀이다.
처음 마주하는 하얀 캔버스는 텅빈 공간일 뿐이다.
나는 그 막연함을 지우기 위해 붓을 든다.
어느덧 여백은 사라지고 거짓 두께를 가진 납작한 화면은 일방적인 형상으로 가득 찬다.
그림이 요구하는 여백은 눈의 형태로 뿌려진다.
그림으로 지우고 여백으로 채운다.
무의미로 채우고 의미로 비워낸다.

나의 설경은 자연 풍경이 아닌
유한한 기억의 착시가 만들어내는 굴절된 과거이며
일그러진 시간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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