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의 뿌리 Root of Imagination

료타르 (Jean-Francois Lyotard)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으로 '마스터 네러티브'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뒤이어 로잘린 크라우스 (Rosalind Krauss)는 포스트 미디엄의 조건으로 일관성과의 이별을 강조한다. 실제로 개념미술을 시작으로 현대미술이 이미지와 텍스트를 하나의 작품 속에 병치시키는 방법을 활용하면서 마스터 네러티브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정 소재와 재료의 미학적인 가공을 이상으로 여겼던 예술의 전통적 정의가 경계를 초월하는 혼성문화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고, 생산되고, 배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해 현대미술이 더 섬세하고, 복잡하고, 때론 난잡하고, 난해해졌다. 이러한 변화된 양상은 국가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 신 자유주의 경제질서와 지구촌이라는 우산 아래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화 교류 속에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 특히 구체적인 것 속에서 보편성을 읽어 내고, 특정 재료의 선택에서 조차 은유적인 상징을 이끌어 내는 관객의 향상된 해석 능력은 '저자의 죽음' 혹은 '관객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미술은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작품이 놓이게 될 다양한 문맥과 담론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에 의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코드로 활용된다.

부부 미디어 아티스트 뮌(Mioon), 박정혁, 정연두, 한진수가 참여하는 전시 "상상력의 뿌리 Root of Imagination"는 이처럼 변화된 미술의 양상을 읽어 내려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반영한다. 이들 4팀의 작가들의 작품은 결코 하나의 소재, 주제, 재료, 장르에 갇히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현대미술은 역사, 문화, 철학, 그리고 개인의 기억이 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구성방식을 통해 인간의 감각기관과 소통하는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전공한 김민선씨와 같은 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을 전공한 최문선씨가 만나 결성한 뮌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전공이 시사하듯이 장르와 경계를 초월하며 동영상, 컴퓨터, 조각, 디자인, 디지털 매핑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2009년 서울시립미술관의 <라이트 월 프로젝트>, 2010년 아우디 A8 런칭 행사를 기념한 <전기인간>, 2012년 BMW과의 협업 등은 그들의 통섭적인 작업 태도를 말해준다. 뒤셀도르프 뉴빌 예술상을 수상한 경력이 말해주듯 뮌의 작업은 단순한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가 강조하는 기술적인 완성도 보다는 그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인문학적인 상상력과 스토리를 중요시 여긴다.

2004년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을 유기견의 냄새로 어지럽혔던 <KMDC 프로젝트>, 그리고 2011년 영화 속 주인공들의 감정의 클라이막스를 짜집기해 만든 <Orinary People전>까지 박정혁의 작업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을 조롱하며, 그 시스템을 덮고 있는 위장막을 걷어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 그래서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인 인터넷에서 박정혁은 불합리, 선정성, 폭력성, 가학성 등 소비문화의 부작용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콜라주해서 세상에 고발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자신의 메시지가 관객에게 보여지는데 있어 역시 위장이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면 회화를 통해서는 중심과 주변, 인물과 배경의 경계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며 이미지 본래의 문맥을 지워버렸고, 영상작업을 통해서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기법을 통해 기승전결의 틀을 허물어 버렸다.

현실과 이상, 실제와 가상, 연극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이어 붙이고 있는 정연두는 영상과 사진을 오가며 작업하는 대표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84분짜리 HD 비디오 작품 <다큐멘터리 노스탈지아>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한 켠을 샹들리에가 매달린 실내 풍경에서 시작해, 약국 간판이 보이는 거리풍경, 그 사이를 지나가는 자동차, 그리고 비가 오는 풍경으로 변화시키더니, 이윽고 가을 추수하는 시골 풍경, 소들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봄 풍경, 그리고 안개와 소나무가 가득한 풍경, 그리고 산 정상에 오른 주인공의 뒷모습을 한 장소에서 모두 보여주었다. 처음 시작 화면과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치를 수동으로 대치해 관객과 영상 사이의 일정한 거리 두기를 유지시킨다. 일종의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로 집중과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해 객관적 판단을 위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정교한 기계와 버블의 우연성을 통해 한진수의 작업이 이원론에 대한 해체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된다. 그의 작업은 기존 질서의 해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날아가는 버블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노스탈지아에 취해 있는 동안 전복과정은 천천히 쉬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작가의 피조물인 설치작품이 어느 순간 작품을 창조하는 저자의 위치를 작가로부터 약탈했고, 한 갓 터지기 쉬운 버블 덩어리는 모이고 모여 거대한 붉은 영토를 정복했고, 배경에 지나지 않던 벽면은 매력적인 회화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전복의 과정이 결과적으로 양 극단의 관계에 있을 이항대립적 요소들 사이에 유기적인 밸런스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평형상태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전복이 우연이 아닌 계획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물리적으로 어떤 것을 잘 만들어 낸다기 보다는 독창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데 더 열중한다. 스토리와 메세지를 우선 정하고 그것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재료와 형식, 기술을 이후에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을 읽어내고, 소비하는 방식 또한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이 세상을 치열하게 관찰했듯이 관객 또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작품에만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그 작품을 통해 작가가 바라보고 싶었던 세상으로 시선의 폭을 넓혀야 한다.

"사람은 죽으면 어떤 물리적인 흔적도 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디어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이자 퍼포먼스 작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c)의 2012년 MoMA PS1의 기조연설은 예술의 앞날은 물질성이 아닌 정신성, 노동이 아닌 아이디어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실제로 그녀의 2009년도 퍼포먼스 작품 "우유를 들고 (Holding Milk)"는 전통적인 조각의 정의를 해체하는 좋은 예로 기억된다. "움직임과 감정의 흐름이 정지된 상태의 어떤 입체적인 형식"이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정의를 떠올리며, 무려 700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 뉴욕 MoMA를 찾은 1400여 명의 관객과의 소통을 이루어낸 그러나 고요하게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던 퍼포먼스를 보고 단순히 "매우 긴 퍼포먼스"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조각" 이라며 새로운 카타고리를 만들어야 되는 것인가? 그 구별이 쉽지 않다. 아니 그런 범주화 자체가 무의미한 시도이다. 관객들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녀의 기발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이대형 (대표, H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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