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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된 우연! 그 시작과 종결이 궁금하다.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것들은 불안하다. 한진수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렇다. 문맥에 따라 유동적일 수 밖에 없는 정체성의 불안은 작가의 시각언어를 통해 냉소적인 뒤틀림으로 비춰진다. 이는 허무주의를 넘어,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유보로 해석되어야 한다.

핑크빛 버블 머신이 세밀하게 정해진 속도로 톱니바퀴를 돌리며 버블을 만들고 이를 허공에 발사한다. 공기의 흐름을 따라, 중력의 무게에 따라 벽면에도, 바닥에도, 혹은 벽을 넘어 엉뚱한 곳까지 버블이 날아가 안착해 자기만의 자국을 남긴다. 차가운 기계적인 감성과 어린아이의 동심을 자극하는 버블,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우연적인 회화에 이르기까지 한진수의 작품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감성과 이성을 충돌시킨다. 철저하게 기계적으로 계산된 이성과 버블의 예측불확실성의 만남이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가가 느꼈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오버랩된다. 이는 일종의 의도된 긴장감의 연출이다. 그런데 사람들을 묘하게 취하게 만드는 것은 그 긴장감 이후에 따라오는 나른한 허무이다.

이 같은 긴장과 이완의 연결고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끝나는지 분별할 수 없게 되는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동안 숨겨졌던 한진수 작품의 주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시작과 끝도, 필연과 우연도, 유한함과 무한함, 부분과 전체, 인간과 기계도 사실 하나의 몸통에서 자라났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을 이원론에 대한 공격 정도로 단순화 시켜서는 안된다. 정교한 기계와 버블의 우연성을 통해 그의 작업이 이원론에 대한 해체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단정지어서는 더욱 안된다. 그의 작업은 기존 질서의 해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포지션간의 소통을 넘어선 전복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요하게 일어나고 있다. 날아가는 버블을 바라보며 어린시절의 노스탈지아에 취해 있는 동안 전복과정은 천천히 쉬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다. 작가의 피조물인 설치작품이 어느 순간 작품을 창조하는 저자의 위치를 작가로부터 약탈했고, 한 갓 터지기 쉬운 버블 덩어리는 모이구 모여 거대한 붉은 영토를 정복했고, 배경에 지나지 않던 벽면은 매력적인 회화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전복의 과정이 결과적으로 양 극단의 관계에 있을 이항대립적 요소들 사이에 유기적인 밸런스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평형상태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전복이 우연이 아닌 계획이었다는 사실이다.

한진수의 작품은 설치와 함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배우가 빠진 일종의 연극무대라고 하면 어떨까. 인물과 텍스트가 빠졌으나 놀랄만큼 정교한 공간 구성은 여백으로 공간을 가득채울 수도 있다는 자신감으로 보인다. 그의 절제된 언어는 공간을 고요한 침묵으로 바꿔 버리며,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을 작은 부분까지도 초점의 대상으로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오브제들을 사유하는 오브제로 바꿔버린다. 배경이라고 생각되었던 소품들이 순식간에 주인공이 되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작가는 그 무대를 구성하는 각각의 오브제들과 그들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들간의 유기적인 관계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보편적인 질서에 "시간"이란 요소를 침투시켜 의도적인 빈틈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한진수의 "시간"개념은 2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이원론이 해체될 수 밖에 없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는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세스가 진행되면서 그 논리적 질서마저 해체시키는 파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간이란 요소가 기계적 장치로 컨트롤 될 수 있는 고정된 진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황문맥에 따라서 지극히 상대적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공간을 정의하는 프레임 역할을 수행하는 시간이지만 정작 그 공간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변수 때문에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휘어지고 왜곡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됨을 의미한다. 작가는 이 같은 문맥 속에서 왜곡되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에, 간섭하지 않고, 관객의 입장에서 조용하게 지켜보길 원한다. 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초월해 변화의 매 순간을 포착하고 그 순간이 야기시키는 새로운 감동을 좀더 객관적인 눈으로 관찰하고픈 작가적 욕심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진수가 절제된 시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분명해 졌다. 그는 흔들리고 불안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배우가 빠진 텅빈 연극무대같은 명상하기 딱 좋은 조용한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 기계 스스로 붉은 물감을 내뿜으며 그림을 그리는 머신을 고안했다. 작가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환경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조형언어의 세련됨은 흔히 볼 수 없는 날카로움을 지녔다. 작품의 작은 구성요소들 간 상호 이야기를 풀어내는 논리에 빈틈이 없고, 그 개념은 지극히 미래지향적이다. 그런데 그 미래 속에서 자꾸 과거의 기억이 연상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자꾸 버블머신을 보면 인간의 모습이 떠오는 것일까? 한진수 그가 이 설치작품 무대에서 슬쩍 자리를 비웠지만 그의 과거와 인간적인 손때는 숨길 수 없나 보다. 그의 잔상은 쉽게 지워지는 그런 허상이 아니었다.

이대형 (대표, Hzone&Absinthe media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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