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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위(不作爲)의 묵종(默從), 그리고 이에 대한 항거자

'어제의 확신을 오늘 등져버린 자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다.' (말레비치)

'포르노그래피는 육체에 대한 정신의 투쟁 형식이다. 그 형식은 고로 무신론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육체를 창조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과잉을 침묵으로 환원시키는 정신 속에 거주하는 과잉 언어가 더 이상 존속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Ⅰ.
2차 세계대전 당시 신학자이자 루터파 목사였던 마르틴 니멜러(Martin Niemöller)는 최초에 나치에 대한 보수적 방관자였다. 처음에는 히틀러에 침묵으로써 부역했던 그가 종국에 히틀러에 항거했던 이유는 히틀러의 교회에 대한 탄압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침묵으로 말미암아 희생되었던 수많은 영혼 앞에서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니멜러의 고백을 들여다 보자.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습격했을 때, 나는 다소 불안해졌다. 그렇지만 결국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 나치는 사회주의를 공격했다. 나의 불안은 조금 더 커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 학교가, 신문이, 유대인이, 이런 식으로 잇달아 공격대상으로 늘어났으며, 그때마다 나의 불안은 커졌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 나치는 교회를 공격했다. 그런데 나는 그야말로 교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3
나치의 행위는 세상을 지배하는 세태의 한가지 유형일 뿐이다. 나는 나치의 악행을 말하려 함이 아니다. 옳고 그름과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을 떠나서 세상은 움직인다는 점을 말하려고 한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의 실체를 가리켜 세태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움직인다.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현실을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의미를 갖는다. 이를 정치학에서 '부작위의 묵종' 이라고 부른다. 이 부작위의 묵종은 현실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너무나 무서운, 세태유지의 조력자이다. 그러나 이 부작위의 묵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분야가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예술이 거의 유일하다. 왜냐하면 예술은 그 존재근거상 기존의 시각적 원칙과 예술계 암약에 항거하여 세운 자신의 새로운 시각적 원칙과 질서를 새로이 평가 받으려는, 인생을 건, 장기적 기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껏 집적된 모든 시각적 예시의 역사를 연구해야만 하며, 살며시 변화해가는 세태라는 괴물에 대해서 해석해야 한다. 동시에 보는 이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투영시킬 수 있는 심미적 기제(aesthetic mechanism)를 구현시켜야만 한다. 따라서 예술가에게는 역사, 정치경제, 사회, 생태계, 공동체, 우주, 성, 인종, 미래가 모두 주제의식이 된다. 그렇지 않고 기존의 시스템과 형식을 안일하게 따르려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에게 '비평적 저항주의'나 '시각적 사유자'라는 레이블은 절대로 붙을 수가 없다. 다만 보수적 상업주의의 성과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모두에 꺼낸 것은 박정혁의 예술이력을 살피는데 좋은 참고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박정혁이 일차적으로 타파하려는 대상은 '부작위의 묵종'이다. 사람들이 갖는 수동적 편향성은 지배층 기획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배태시킨다. 이 무비판적 세상 따라가기가 또다시 소통 없는 일방적 허무의 욕망을 생산한다. 박정혁에 따르면 이 '욕망이라는 희극적 미끼야말로 절대다수를 지배하는 원천적 힘'이라는 것이다. 진정 박정혁이 세상에 이름을 알린 계기는 2004년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을 어지럽혔던 'KMDC 프로젝트'의 현기증이었을 것이다. 성격이 이상하거나 볼품 없이 병약하고 나이든 유기견들을 콘테스트 형식으로 순위라는 상을 수여했다. 이 유기견과 콘테스트의 유비관계는 인간사 모든 현상으로 확산될 수 있다. 예컨대, 예술가와 비엔날레, 아니면 정치가와 대선이 대표적일 것이다. 세간의 희화화를 통해 혹닉(惑溺)을 타파시키려던 박정혁의 기도들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예상불허의 다양한 형식으로 번져나갔다. 특히나 빛났던 자기실존의 발현은 두말할 것 없이 2004년도 작품 '166cm'이다. 작가가 서른 즈음에 맞이했던 친조모의 마지막 죽음과의 사투를 채록한 영상이다. 회광반조(回光返照)의 불빛이랄까. 삶의 마지막을 앞둔 조모의 비명은 거셌다. 박정혁의 세간의 희화화가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뼈를 깎는 고통임을 이 작품 하나가 전부 대변한다. 죽어가는 조모는 사람들의 최대가치를 상징한다. 절대적으로 객관화될 수 없는 바로 가족애 그것이다. 희로애락의 삶의 역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 감정의 여운을 절치부심 객관화시켰던 이유는 가족이라는 혹닉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가치편향, 이치관념에 대한 투쟁선언이었다.


Ⅱ.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Henrik Johan Ibsen)의 연극 '페르귄트(Peer Gynt)'에는 '늑대떼가 밖에서 미친 듯이 부르짖을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들을 따라 나도 울부짖는 것이다'는 대사가 나온다. 박정혁은 다르다. 늑대떼가 밖에서 울부짖을 때 박정혁은 차라리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거나 돌멩이를 투척한다. 그의 투척 대상은 기존의 예술방법을 향한 것이다. 주지와 같이 1989년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한국의 엘리트주의 미술과 민중미술의 이치적(二値的) 대립이 사라졌다. 이 두 기단이 충돌 후 사망함으로써 많은 강우를 유발시켰는데 그것은 서구 정보의 대량유입, 포스트 마르크스 대안 찾기로서의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적극 수입, 외국 유학파의 유입으로 인한 서구형식의 무비판적 확산 등으로 압축 설명할 수 있다. 동유럽 사회주의에 대한 서유럽 자유주의의 승리는 진보적 지식인이나 비평주의적 예술가들로 하여금 신념보다는 실리, 삶의 진지함보다는 시스템으로의 타협을 종용했다. 사회를 성격적으로 규정했을 때 강박, 신경질, 데카당스, 댄디즘, 패셔니스트, 이국주의가 만연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TV, 영화, 비디오, 만화, 인터넷과 외국도서를 통한 전대미문의 이미지의 범람, 그리고 검열의 약화를 통한 불법적 이미지의 공유 또한 90년대 처음 일어난 일이다. 이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 박정혁의 정신이 배태되었다.
90년대 미술가들은 서구 따라 하기에 열을 올렸다. 매체의 무한수용, 게다가 서구의 모작이 홍수를 이뤘다. 이 모작들은 해외 유학파의 손길을 따라 전시장에 유포되었고 진정성의 기준도 사실 애매했다. 특히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진수로 둔갑하면서 입국한 전시는 1994년도 '휘트니비엔날레 인 서울'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때 소개된 로버트 롱고, 데이비드 살르, 에릭 피슬, 줄리앙 슈나벨처럼 특수한 방법론의 스타일을 자기 브랜드화해서 상업적 레이블을 굳건히 강화시켜가는 보수적 상업주의 작가들의 모습이 만연했다. 박정혁은 민중미술의 패퇴로 괴로워하는 의식적 선배들과 매체주의에서 새로운 출구를 찾았던 신진 동료들 사이에서 무수한 갈등을 느낀 인물이다. 동시에 위에서 본 것처럼 전혀 감흥 없었던 낯선 상업적 현상들이 자신들이야말로 주류이자 대세라는 명분으로 때로는 압박했고 때로는 유혹한 것이다. 박정혁은 어지러운 이 모든 정황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제로베이스를 찾았다. 세상을 향한 예술의 당위성이 무엇인가를 묻거나 예술을 끝없이 지속시켰던 역사의 내적 필연성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자기 질문에 스스로 답하려 했다.
박정혁의 대답은 비교적 장기간이 흐른 지금에서도 완성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 과정의 진지함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박정혁이 가장 아파하는 현실은 '부작위의 묵종'과 비슷한 말이다. 그것은 피터 브뤼겔의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그림' 속의 상황이며 절벽을 만나면 떨어져 절멸하고 마는 양떼들의 습성과도 같다. 박정혁은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념을 세워야 하며 카테고리를 구분하고 가치편중화를 어쩔 수 없이 묵인해야만 하는 제한적 존재"라고 말한다. A를 이해하기 위해 B를 곡해해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부정교합(malocclusion)'은 윗니와 아랫니가 맞물리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21세기에서나 유행하기 시작했다. 세간 모처의 상술이 상식으로 자리잡아 모든 이의 무의식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요즘의 이 상식대로라면 윗니가 돌출된 사람은 비정상(abnormal)이며 위아래가 딱 맞물려야만 정상(normal)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부정교합이라는 개념을 들어 정상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카테고리를 나눌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박정혁이 유명하게 만든 단어는 또 있다. 식물의 어떤 기관이 위치 이상을 보였을 때 지칭하는 '도립(倒立, resupination)'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이 도립이라는 현상이 진정으로 식물의 생장이나 꽃의 만개를 저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식물학자의 개념일 뿐이다. 박정혁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예술가가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사항을 인간이 지니는 개념과 편견에 내재된 폭력성을 드러내려는 의지에서 찾은 것이다. 그것은 박정혁을 여타 다른 예술가와 구별해주는 작지만 위대한 작위(作爲)의 실천이었다.
앞서 말한 신학자 니멜러는 마지막 참회를 통해 사상의 은인이자 반전 행동주의자로 거듭났다. 니멜러는 자신의 묵인과 방관이 부른 대참사를 통렬히 아파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얻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처음에 저항하라(Principiis obsta)'이며 두 번째는 '결말을 생각하라(Finem respice)'는 원칙이다. 박정혁의 예술이력은 니멜러의 원칙과 아주 잘 부합한다. 처음에 늑대떼에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다.' 즉 제도권의 미술에 합류되는 자신을 부정했다. 끝내 오갈 곳 없이 외로워졌다. 그러나 무언가를 했다는 자신감만은 있었다. 이 자신감은 박정혁으로 하여금 '최종 결말을 생각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었다.' 이는 바로 2008년도의 이야기다. 그리고 박정혁이 가장 되고 싶은 결말은 세대를 대표하는 페인터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세대의 허무와 공포를 알려야 했다. 적어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 철저한 상업적 자본주의로부터 내면화되기 시작한 첫 번째 세대가 있다면 1970년대 태어난 박정혁의 세대임이 분명하다. 그 내면화의 방법론은 반복적 어휘나 학습의 세뇌가 아니었다. 스피디하며 도발적이되 문명의 색깔을 머금은 이미지의 남용으로 내면화된 것이다. 자기 세대의 허무와 공포를 철저히 알리는 회화 연작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포르노그래피, 종교적 도상, 무의식을 좀먹는 부정교합이라는 개념적 폭력성, 상품 이미지, 성적인 냄새가 나는 체벌 이미지, 동물적 활력, 뜨거운 불길의 이미지 등 온갖 데카당스가 뒤섞여 있다. 중심과 주변이나 주인공과 조연이 따로 없다. 거대한 소비 메커니즘으로 인해서 공룡이 멸종한 것처럼 또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의 비극처럼 절멸(絶滅, catastrophe)에는 상하와 좌우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인간을 절멸로 이끌 소비 메커니즘의 기마첨병(騎馬尖兵)이 바로 박정혁이 사용하는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박정혁의 회화 의미, 나아가 예술의 자기 목적은 '보통 사람들(ordinary people)'이라는 제목의 야심 찬 신작 영상에서 종합된다. 총 5개의 영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상영되는데 50여 편의 동서양의 영화와 드라마를 짜깁기해서 극화시킨 작품이다. 일종의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기법인 이 작품은 5편의 작품이 각각 인간 감정의 삼라만상을 드러낸다. 그러다 특정 영상의 분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이 있다. 절정의 순간, 어떤 영상은 목청으로 분노를 포효하는가 하면 어떤 영상은 총사를 난발하기도 한다. 또 개가 울부짖기도 한다. 하나의 화면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나머지 네 개의 화면은 미장센으로 돌변하여 백기를 든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는 절정의 극화된 순간을 위해서 모든 것이 봉사되는 구조를 갖는다. 바로 박정혁의 설명이다. 목구멍에서 괴성을 포효하건 총부리에서 화염이 난사되건 눈가에서 눈물이 그침 없이 흐르던 간에 감정의 발산에 대해서만큼은 우리가 저지할 수도 없고 방해해서도 안 되는 감정의 원형(Urtypus)이다. 누구나 이러한 원형질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인간이다. 상대를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발산하려고 하고 사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를 억누르는 문화에서 통제하는 문화로 이행하더니 급기야 그것을 왜곡하고 변질시켜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남용의 시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우리는 박정혁의 유례없이 플라스틱 냄새 물씬하면서 스피디한 붓질과 상하좌우는 물론 중심과 종속마저 따로 없는 회화 구성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내야만 한다.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인간이 내리는 최종처분은 복수라는 이름의 응징임을 끝끝내 읽어내야 한다.

이진명,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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