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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속도가 풍경을 만든다

색은 평평하지 않고, 경계선은 정확하지 않으며, 사람의 흔적은 쉽게 발견하기 어렵고, 빛이
존재하나 그것이 비추고자 하는 형상이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다. 또한 건축물과 풍경이 등장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작품의 주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인간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사람이 떠나가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공간, 그리고 그나마 등장하는 인물은 뒷모습만
노출하며 정체를 숨기는 김영배의 그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그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단순히 빈 공간이나 풍경, 오브제가 아닌 그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기억의 파편이고 그것들의 축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김영배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시간개념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고정
된 회화작품을 가지고 유동적인 시간개념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분명한 것
은 김영배의 시간개념이 과거의 순간을 그렸다고 해서, 기억을 더듬어서 재편집했다고 해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점이다. 몇 가지 시각적인 장치들과 그들이 어떻게 상호
기능하는지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시간에도 상대적인 속도가 존재한다고 가정했을 때, 김영배의 그것은 무척이나
느린 리듬을 선택하고 있다. 그래서 더 빨리 더 많이 보기를 원하는 동시대의 열망을 반영하
는데 는 실패한다. 대신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 (Sculpting in Time)”처럼 응축된 시간
과 공간적 배경을 만들어 낸다. 한편의 시를 감상하는 것 처럼 시간과 감정이입을 요구한다.
그래서 비록 빠른 편집과 기교적인 미장센이 만들어내는 화려함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화면
을 지배하고 있는 고요함은 숨 고르기를 해야지만 감지할 수 있는 미묘한 잔상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관객이 김영배의 다소 느린 시간의 리듬에 속도를 맞추기 시작하면서 사소했던
장면과 풍경 속에 숨겨진 사건과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시간개념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 속 시간이 특정 시기로 한정되는 것
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는 시간이 한정되면 그 안에 펼쳐질 수 있는 스토리 또한 한정적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 작품 속 이미지를 다음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는 방법
등을 동원하여 복합적인 시간대가 공존하는 공간을 완성해 나간다. 그 과정에 순서를 부여
하면, 우선 대상을 그리고 그 대상에서 특정 시기를 읽어 낼 수 있는 사건을 지워버린다. 그
다음 기억의 종합을 통해 다양한 시간대를 하나의 공간 안에 구성해 낸다. 이렇게 얻어진
공간은 과거의 풍경 혹은 외부의 풍경 이라기 보다는 다가갈 수 없는 혹은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에 대한 작가의 열망이 투사된 내적 풍경에 가깝다.
풍경을 특정 이미지로 인식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프레임’은 한국인이면서 독일에서
23년 동안 작업해야 했던 김영배에게 있어 자신의 회화공간을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인식할 수
있게 만들고 있는 매우 중요한 구조적 틀이다. ‘프레임’의 안과 밖은 한국사회와 독일사회
의 안과 밖처럼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심지어 자신의 아이덴터티를 해석하는 방식에게
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2003년 이후로 등장하기 시작한 인물의 “뒷모습” 역시 김영배의 공간 개념과 시간 개념을
확인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 뒷모습을 통해 익명성을 확보한 작가는 특정 인물로 인해 공간과
시간의 해석이 한정될 수 있는 여지를 처음부터 차단한다. 그리고 관객과 같은 방향으로 풍경
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구조를 통해 풍경과 인물 그리고 관객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
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배의 풍경이란 일종의 연극무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막혀 있던 벽에 구멍을 내고, 떠났던 사람을 다시 풍경 속으로 끌어들이고, 물결을 통해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있는 김영배의 풍경 즉 개인적인 기억의 축적은 연극무대
처럼 누구든지 그 안에 스토리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중립성의 공간으로 재탄생된다.
그의 과거에 대한 집착은 다양한 시각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그림자를 통해 구체화된다.
사물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내는 것이 빛이라면 그림자는 그 사물에 실재적인 무게감을 부여
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김영배의 그림을 구성하는 빛과 그림자를 음양의 조화 정도로
단순화시켜 이해해선 안 된다. 그에게 있어 그림자라는 것은 기억이고, 과거이고, 스토리의
시작이며 공상의 실체이다. 그래서 증발할 수 있는 기억의 파편들에게 무게감을 주고 견고
하게 하나의 화면 속에 화석화 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수행한다. 단순히 일루전을 만들어내는
형식적인 보조제가 아닌 역사성과 개인의 기억까지도 층층히 담아낼 수 있는 상징적인 수단
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그의 최근 작품들이 이전 그림과 비교해 빛과 유토피아만을 지향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따뜻한 인간 냄새”는 사람
이 사라진 빈 공간, 빛을 찬란하게 만들어내는 그림자,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뒷모습, 주변을
두리번 거리지 않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정적인 화면과 그것을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프레임
까지 세심하게 그려낸 결과이다. 김영배의 그림 속 사람이 빈 무대, 그러나 우리는 그 곳에서
우리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풍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어쩌면 우리 자신의
소중한 기억일지도....

이 대 형 (대표, H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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