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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있는 삶을 지향하는 텅빈 도시


미술사를 처음 공부하던 시절 고야 (Francisco de Goya)의 <거인 Colossus>을 보고 우리나라의 풍경을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전경에는 혼비백산한 인간들이 혼란스럽게 엉켜있는데 중경의 산 너머에 커다란 거인이 서 있는 작품이다. 지금도 왜 이 작품을 보고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변 풍경을 떠올렸는지는 모른다. 단지 어릴 적 추억과 관계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방학이면 시골 할아버지 댁을 찾았던 시절,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서 만나는 특이한 풍경 중에 하나가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는 커다란 송전탑들의 행진이었다. 어린 눈에 그 풍경은 마치 커다란 거인 로봇 군단이 행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국토에서 볼 수 있는 생경한 풍경은 이것만이 아니다. 프랑스의 지리학자 줄레조(Valerie Gelezeau)는 서구의 대단지 아파트 모델이 실패한 반면 한국에서 어떻게 그것이 모든 계층이 선호하는 이상적 주거 형태가 되었는지를 물으며, 미학적 기준에 반하는 도시 경관을 양산해내고 지리학에 반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한국의 사례는 유별난 것이라 분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 어디라도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어색하게 우뚝 솟은 아파트들을 볼 수 있다. 주변의 경관을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이 건물들은 스스로 자가 증식하듯 우후죽순 도시의 이곳저곳에 씨를 퍼트려 군집을 이루며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배성희는 이러한 아파트와 그것을 둘러싼 도시의 인공정원을 대상으로 작업한다. 작가의 작품에는 도시인의 안락한 삶을 위한 인공정원과 그것을 배경으로 마치 산등성을 넘어가고 있는 철탑거인처럼 위용을 자랑하는 아파트가 서 있다. 색이 배제된 흑백의 화면과 자를 대고 그은 듯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 정갈하게 포치된 나무들이 배성희의 화면을 주도한다. 이러한 특징은 처음 그의 작품을 대하는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 모든 요소들이 문득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배성희의 작업에서 느끼는 이와 같은 양가적 감정은 작가의 작업 스타일에서 연유한다. 지방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대학 3~4학년을 계기로 도시의 풍경을 작업으로 옮긴다. 이후 인공적인 정원 문화가 발달한 서구에서의 유학 생활을 통해 규칙적으로 조성된 공원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인공정원이 주는 조율된 기하학성에 매료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와 상반되게 인공적으로 이식된 나무들이 드러내는 생명력의 작위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즉, 규율되고 조직됨으로서 드러나는 기하학적 아름다움과 그러한 아름다움을 위해 인간에 의해 옮겨 심어진 자연이 스스로의 본질적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에서 오는 생경함이 작가로 하여금 도시의 인공정원에 집중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인공정원에의 관심은 귀국 이후 줄레조도 지적한 바 있듯 한국적인 특질을 보여주는 아파트라는 독특한 주거형태와 결합되면서 다시금 변화를 맞게 된다. 그 결과, 인공정원과 결합된 아파트는 작가로 하여금 도시로 대변되는 조직된 삶에 대한 로망과 더불어 도시적 삶이 가져오는 획일화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나는 기재로 작용한다.
한편, 판화를 전공한 작가는 이상의 주제를 동판화를 제작하듯 세밀한 필치와 흑색의 가느다란 선을 이용하여 그려낸다. 일체의 색이 배제된 흑백의 화면 속에서 아파트와 주변 경관의 동일한 단위들은 무수한 자가 복제를 통해 증식한다. 이처럼 작가의 초기 작업부터 지속되고 있는 작품 제작방식은 전시장 한 켠에 마련된 워크스테이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파트의 모델하우스 모형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 작업은 온라인 마을 만들기 게임의 오프라인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작업에서는 도심의 풍경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이 최소단위로 모듈화 되어 나타나는데, 관객들은 이같은 개별적인 단위들을 조합함으로써 도시를 만들어 나가며, 그에 따라 도시 풍광은 비대해 진다. 동일한 유닛의 반복적 증식은 근대화 및 산업화시기를 주도한 모더니즘의 작동원리를 떠올리게 하는데, 관객은 이러한 단위들을 조합하는 행위를 통해 근대화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배성희의 이전 작업이 모더니즘적인 그리드를 기본으로 반복과 규율에 의거한 20세기 전반의 유토피아적 열망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새로운 시도를 감행한다. 기하학적 패턴을 기준으로 한 이전작업과는 달리 최근 작업은 규칙이 없이 복제 증식된다는 점이다. 작가의 이러한 변모는 최근 아파트 문화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더니즘 건축의 강요된 획일화와 표준화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규격화하고 동일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면, 타인과 구별되는 다름을 지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아파트들은 차이와 다름의 전략에 따라 운치와 품격을 가지고 삶의 여유를 누리는 주거공간을 지향하게 된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브랜드화를 지향하는 아파트들은 모더니즘 시대의 아파트 문화가 그것이 위치한 장소가 갖는 특이성을 상실했기에 획일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뚜렷한 장소 정체성을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우게 된다. 그것은 획일화된 모습으로의 장소상실 및 무장소성을 타개하고 차별화되고 구별화된 삶의 질을 담보하려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장소 정체성은 삶의 향취와 품격, 그리고 그것에 동반하는 기억을 담보하는 듯이 비춰지는 것이다. 브랜드화된 아파트와 그것을 둘러싼 인공정원은 이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품격을 위해 인공이 인공임을 드러내지 않고 가능한 한 자연을 위장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포스트모던시대 아파트의 마켓팅 전략은 그러나 배성희의 화면에서 무화된다. 인공이 자연을 위장하는 가운데 작가가 이것을 다루는 방식은 독특하다. 조감도적 시선을 통해 넓은 가시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화면에는 나무들이 포치되어 있고, 그 주변에는 아파트들이 포치되어 있다. 그러나 화면 속 아파트는 그 존재를 드러내기 보다는 선으로 간략하게 처리되거나 혹은 그것이 위치한 자리만을 남긴 채 화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존재한다고도 혹은 부재한다고도 할 수 없는 이들 아파트들은 화면 속에서 존재하지만 부재하고, 부재하지만 또 존재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장소와 그리고 장소를 통해서 공간과 맺는 본질적 관계는, 인간의 속성인 거주에 있다고 했다. 굳이 그의 논리를 빌리지 않더라도 아파트는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인 거주를 위한 공간이고 배성희가 화면의 주체로 다루고 있는 인공정원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위한 기재들이다. 그러나 배성희의 화면에는 거주하는 사람들의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 조성된 인공정원 너머에 거주를 위한 삶의 터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의 주인은 아파트도 그리고 그곳에 살 것으로 상정되는 주민들도 아닌 자연을 가장한 인공의 정원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삶의 체취가 배어있는 공간은 기억이 스며있기에 장소로 거듭난다. 아무리 평범하고 특별날 것 없는 일상의 공간일지라도 삶의 체취가 묻어있는 공간은 진정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살필 때, 존재한다고도 부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 배성희의 작품 속 아파트에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없다. 아니 삶의 체취와 흔적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의 체취와 흔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과 연관된 기억도 자리할 곳이 없다. 그렇기에 화면 속 공간은 마치 청정무구한 진공상태 속에서 부유하고 있는 듯이 중성적 공간으로 남게 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이 공간은 기억이 얽혀있는 장소로 화하지 못하고 무장소(혹은 상실된 장소)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화면을 보며 우리가 그 정갈함에 기꺼워하면서도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흔히 공간의 의미는 공간을 유용하는 주체에 의해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배성희의 공간에는 인간에 의해 영위되는 삶과 기억이 없고, 그렇기에 이곳에는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주체 역시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런 이유로 배성희의 작업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아파트 전략을 무화시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풍요로운 삶을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곳은 비어있으며, 그 결과 풍요로운 삶을 통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은 생명력과 삶의 체취를 상실하고 삭막하게 박제화 된 디스토피아적 도시로 화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배성희의 화면은 이렇게 상반되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화면에서 반복됨으로써, 상호 이질적인 것들이 병렬 공존하는 혼재향으로써의 헤테로토피아적 세계를 구성하게 된다.
이처럼 배성희가 그려내는 풍요로운 삶을 지향하는 텅빈 도시는 모더니즘 시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기획되고 조율되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생경한 풍경으로서의 배성희의 화면이 갖는 힘이라 할 수 있다

기혜경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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