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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형태를 감싼 두께와 그 두께를 가진 조각의 표면
[박천욱 개인전: 반측면 Half side/Other side] 안소연 미술비평가

1. 상황과 조건
이 독립적인 형태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벽에 걸리고, 평평한 바닥에 가만히 놓이고, 좌대 위에 따로 올려지고, 그렇게 전시 공간 속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들은 일제히 “주체롭다”는 정체성을 함의하고 있다. 박천욱의 개인전 《반측면 Half side/Other side》(2018)은, 단일한 재료가 만들어낸 동질성과 추상적 형태들이 이루고 있는 조형의 질서가 완결된 형태의 균형을 과시하면서 전시의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어떻게 보여지는가 하는 문제는 그 형태를 무엇으로 지각하는가와 맞닿아 있으므로, 일련의 형태가 갖는 정체성은 그것의 존재 방식과 지각 방식 사이에서 (모순과 함께) 만들어질게 확실하다. 그것을 굳이 형태의 정체성이라 부르는 것은, 이때의 형태가 스스로의 주체성을 끈질기게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흥미로운 모순에 직접 연루되지 않으면서도, 희미한 상황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그것을 내내 의심하는 자리에 서 있어 보기로 했다.

2. 자립과 기생
대략 2016년부터 시작된 <주체롭게> 시리즈에 대해서, 박천욱은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작품, 어떤 환경과 공간에서도 독립적인 작품, 그 작품이 선행적으로 말과 내용과 의미를 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음을 말했다.(작가노트, 2016) 이는 “바라보는 새로운 태도에 대한 일련의 실험”임을 알리면서, 결과적으로 그 속내는 임의의 형태를 구현하기 위한 조형적 당위성에서 일종의 완결된 형태가 획득하게 될 주체성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그가 말하는 시각언어로 “자립”한다는 것은, 일체의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단지 시각적인 형태로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음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인식이 고안해낸 “시각적 형태들”은, 최근의 작업 <주체롭게 자라나다 1>(2017), <주체롭게 자라나다 2>(2017), <주체롭게 자라나다 1+2>(2018)를 통해 그동안 축적된 조형적 질서를 통합하며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예컨대, 그는 일상에서 평범하고 흔하게 사용하는 기성 물품들을 임의로 가져와 그것의 기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그 (기능이 배제된) 형태가 함의하는 조형적 특성에만 몰두했다. 사실 사물의 형태라는 것이 기능과 전혀 무관할리 없다. 때문에 박천욱은 언뜻 형태에만 고집스럽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작업의 과정에서 형태에 대한 집중을 조금이라도 방해할만한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조형적 논리를 찾아 구축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능을 위한 형태의 디자인 명분들을 제거하고 사물의 기능적 가치를 최대한 소멸시킨 후, 존재하는 것 외에 아무 의도도 없는 자율적인 형태와 그렇게 구축된 형태가 스스로의 조형적 투명성을 외부로 발휘하는 방법을 강조해 왔다.
그동안 지속해 온 <주체롭게> 연작에서는, 물건들의 기능을 제거하여 형태에 충실한 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물을 그대로 가져와서 불필요한 부분은 절단하고 중첩되는 부분의 면과 면을 결합시켜 형태가 자율적으로 증식하는 방식의 조형성을 극대화했다. 박천욱은 이를 형태가 스스로 “주체롭게 자라나는” 것으로 인식하여, 주체적인 생성 과정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물의 고유한 형태와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변형의 논리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주체성이 드러나는 지점에서 사물과 조각의 경계 내지는 둘의 서로 다른 범주들을 강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사물에서 기능에 대한 설명적이고 서사적인 요소들을 남김 없이 제거했을 때, 최종적으로 남겨진 형태는 스스로의 구조적 조건과 조형적 질서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미학적 관점에서의) “조각적 형태”에 바짝 다가가게 된다. 이로써, 형태의 질서 속에서 새롭게 구축된 조형물은 사물에서 조각적 형태로의 자립을 성취해낸 결과물로서의 충분한 의의를 갖게 된다.
박천욱의 작업에서 사물의 형태적 자립은 비약적으로 조각적 시도라는 결과를 끌고 오는데, 역설적이게도 조각적 형태로 자립하게 된 그 “중간 상태”로서의 사물-조각은 아직 증식하고 있는(자라나는) 혹은 마땅한 범주에 포함될 수 없는 임의적인 상황 속에서 사물과 조각 사이에 기생해야 할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말하자면, 박천욱이 말하는 형태적 자립은, “제거된 의미들”에 가까이 기생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필요충분의 역설과 모순 속에서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개인전에서 새롭게 시도한 <주체롭게> 연작은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크다. 표면 상, 사물로서의 형태는 없어지고 재료의 물질적인 구축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주체롭게 1>(2016)과 <주체롭게 2>(2016)의 연속으로 살필 수 있을 것 같은 일련의 작업들은, 특히 제시된 결과만으로 형태의 정체성 혹은 내부에 함의하고 있는 조형적 질서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 단일한 재료가 강조하는 균일하고 반짝이는 표면의 질감은 생각보다 형태의 구축 원리를 투명하게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그렇다면, 박천욱이 말하는 이 불확실한 형태의 주체성은 어디서 어떻게 자리하고 있는 것인가.

3. 두께와 표면
이번 전시에서 처음 소개된 <주체롭게> 연작은 동판을 용접해서 만든 추상적인 구축물이라는 점에서, 예전 작업과 사뭇 다른 인상의 조형성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표면의 광택이 환기시키는 반사효과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만들어지는 선과 면의 구성효과를 들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시각적 장치들은 각각의 형태가 함의하고 있는 독립적인 형식 논리이자 형태가 지닌 내적 충족성으로 확대시켜 분석해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우리의 지각은 그 반대에 직면할 가능성도 크다. 다시 말해, 여기서의 과도한 시각적 장치들이 형태에 대한 분석적 근거를 마련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모호함과 불확실함으로 빠트리는 반전을 겪는다는 말이다. 적어도 그간 박천욱의 작업 맥락을 안다면, 더욱 그렇다. 그는 최근까지의 <주체롭게> 연작에서, 사물의 기능을 제거해 형태상의 새로운 조형적 구축을 시도하거나 혹은 추상적인 형태를 임의로 고안해 내서 특정 재료를 사용하여 삼차원의 형태로 재현하는 과정 자체를 보여줬다. 이렇듯 기존의 작업들이 주목한 과정과 결과는 다소 다르지만 일괄적으로 형태의 구축 논리를 전면에 노출시킨 작업이었다면, 짐작컨대, 이번 작업은 그 둘 사이에서 파생된 것 같기도 하고 그 둘의 변증법적 관계의 합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한데 상세한 정황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주체롭게3>과 <주체롭게4>(2018)는 원판, 원기둥, 원뿔이 서로 차곡차곡 구축된 유기적인 추상조각에 가깝다. <주체롭게5>(2018)도 서로 미묘하게 다른 다면체들이 적당한 변형과 균형을 이루며 유기적으로 연결된 단순한 구조적 관계를 환기시킨다. <주체롭게6>(2018)은 직사각형의 큰 틀이 그 바깥의 꼭짓점을 향해 수렴하는 일종의 낮은 사각뿔 구조를 띠고 있다. 대략 이런 형태들이다. 대부분의 형상들은 선과 면들이 만나 입체적이고 유기적인 구축을 시도하고 있으며, 누누이 말하지만 동판이라는 단일 소재의 사용으로 전체가 또 다시 유기적인 동질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표면의 광택은 그 반짝거림으로 인해 전시장 내의 시선을 단번에 모으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시각적 집중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치들이 동시에 예상치 못한 모순을 발생시키기도 하는데, 결정적으로 표면의 반사효과는 형태의 자립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기꺼이 환경과의 연합을 꾀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표면에 투영된 외부 환경이 이 형태들을 계속해서 공간 속에 유동하는 것처럼 지각하게 함으로써, 시선은 되레 형태 안으로 더 파고들지 못하고 바깥으로 끊임없이 튕겨져 형태에 대한 지각을 방해받는다. 금속으로 된 추상적인 형태들이 각각 고유한 형태들을 가지고 전시 공간에 조용히 배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간을 이동하는 각각의 다양한 시선과 그 시점들을 담아내느라 분주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표면이 일반적인 거울처럼 납작하고 평평한 것이 아니라, 경사면을 가지기도 하고 꺾이고 휘어지고 한 점으로 사라지며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버리는 등 두께를 가진 삼차원의 표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마주보는 상황에서 형태의 표면에 투영된 외부 환경은 왜곡되고 변형되어 뒤틀린 환영처럼 보인다. 나는 이러한 예상치 못한 표면의 효과야말로 박천욱이 줄곧 시도해왔던 형태의 주체성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 반짝이는 표면들이 환기시키는 두께야 말로 형태들의 구축적 논리와 질서를 알리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두께를 가진 “삼차원의 표면”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박천욱은 여느 때와 같이 자립하는 형태로서 일련의 조각적 형태들을 만들기 위해 정당한 절차와 조건을 모색했는데, 이는 일관되게 형태의 기능을 없앤다는 조건에서 출발한다. 그는 사용하던 의자며, 탁자, 사다리 등 익숙하고 평범한 물건들을 가져와 그것의 사용을 불가능하게 하려는 조형적인 개입을 시도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2단 사다리를 가져와서 발을 딛고 올라가지 못하도록 평평한 발판 부분을 없애는 것이다. 결국 사물의 형태를 거스르기 위해 감싸는데 필요한 임의의 두께가 필요하게 됐고, 그 두께들은 표면을 얻어 삼차원의 조각적 형태로 자립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었다.

4. 부록
<반측면_카탈로그>(2018)는 박천욱이 제시하는 주체로운 형태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제공한다. 거기에는, 형태를 구축하고 있는 반짝이는 표면과 그것이 감싸고 있는 조각적 양감으로서의 두께가 어떻게 기능하던 사물의 형태를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는지, 그렇다면 표면과 두께만 가지고 실제 공간 속에 배치된 형태들은 우리의 시지각에 의해 무엇으로 판단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심을 다시 환기시키는 아주 최소한의 정보가 적절하게 제시되어 있다. <주체롭게> 연작을 시작하던 때부터, 박천욱의 관심은 환경과 공간과 의미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시각적 형태가 내적으로 충족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완전하게 지각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넘어가 다시 외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측면_카탈로그>는 주체로운 형태들이 스스로의 조형적 당위성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절차를 보여주는 일종의 합법적인 서류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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