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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의 탄생 그리고 타자의 소멸

성별, 피부색, 키, 몸무게, 나이 등 신체적 조건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해석은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몸을 물리적인, 생물학적인 구조가 아닌 문화적인 개념 혹은 사회적인 욕망으로 바라보는 시점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1818년 메리 쉘리 (Mary Shelley)의 프란켄슈타인, 1963년 마블 코믹스의 엑스맨, 1984년 제임스 카메룬의 터미네이터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 조금만 달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죽은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실험, 돌연변이 변종인류의 증식, 기계인간의 반격 등은 하나 같이 타자화 되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소외감, 상실감, 부적응을 소설, 만화, 영화로 반영한 결과물이다.

이는 제어를 벗어난 테크놀로지, 과학, 사회 현상,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와 다르지 않다. “인간을 위한” 기계, 시스템, 약품을 만들겠다는 최초의 좋은 의도가 언제든지 예상치 못한 폭력성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미래로 다가갈 수록 그 농도가 짙어질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실제 인간의 존재까지도 대치할지도 모른다. 인류가 만들어 놓은 덫에 인류가 빠져버리는 패러독스는 반복, 확대, 재생산의 과정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성을 냄새에 비유해 몽환적인 화면을 만들었던 이승민의 이번 신작들은 기계인간의 모습으로 진화한다. 스스로 학창시절을 악동으로 묘사하며 개인적인 기억의 파편에 의존했던 방법론이 사회를 관찰하는 네러티브로 바뀌어, 파편화되고 기계화된 사회구조를 들여다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시점은 1964년 출간된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와 동일선 상에서 출발한다. 눈에 보이는 컨텐츠가 아닌 그것을 전달하는 테크놀로지 미디어 자체의 특성이 서로 다른 국가, 정체성, 이데올로기를 쉽게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변화된 환경을 지적하고 그 변화된 구조가 만들어낼 미래성을 읽어내고 있다. 신문, 잡지처럼 텍스트와 메세지가 비록 없다고 해도, 전구가 발명되어 밤을 빛의 공간으로 재탄생 시켰고, 그 빛 아래서 다양한 텍스트와 메시지가 생산되고, 결국 밤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수 밖에 없었던 맥락을 끄집어 냈던 맥루한의 철학적 관점이 이승민의 작품과 오버랩되고 있다. 전구가 눈의 기능을 연장 시킨 것이다. 이처럼 기계와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인간의 신체 기능을 연장시키며 결국 정체성의 범위까지도 확장 시키고 있다. 기계에 의존하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아닌 기계의 전자감각 장치들이 인간의 촉수가 되어 세상을 읽어내고 나를 정의하는 분리할 수 없는 신체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기계장치는 여전히 공포스런 대상이다.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부속품이어야 안심할 수 있고, 될 수 있으면 사람을 닮지 않아야 혐오감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여러 문학작품과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민의 기계들은 사람을 닮았고, 인간의 부품으로 머무르려 하지 않고, 인간 자체의 모습을 기계구조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손, 발 등 뇌의 명령을 받아 수행하는 수동적인 부속이 아닌 인간의 머리를 기계로 보여주며, 관객이 바라보는 인물이 진짜 인간인지 아니면 기계부속품의 결합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간의 제어에서 벗어난 기계인간 혹은 인간의 의식까지도 지배할지 모르는 사이보그를 탄생시킨 것이다. 일종의 오랜 금기를 깨버린 불경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승민의 사이보그는 사람들의 편견처럼 결코 공포스런 대상이 아니다. 그는 순수한 모습의 어린 아이들의 두상 이미지를 기계부품과 결합시켰다. 어린 아이의 평온한 이미지와, 사이보그 만화에 열광했던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점의 이동은 기계가 내포하고 있는 잠재된 폭력성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 주체와 타자의 섞이지 않는 충돌을 극복하고, 친근한 소통까지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을 바라보는 정의, 즉 현대사회 속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외연이 확장되는 시각경험을 사이보그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의 시점을 인간의 신체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과 기계 사이 정중앙에서 양쪽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 인간에게 부족한 기능을 보안하는 신체의 연장선이 아닌 “인간성” 자체에 대한 외연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읽어내게 만든다.

이처럼 이승민의 사이보그는 기계에서 태어났는지, 인간으로부터 자라났는지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과 신체기관들, 물리적인 재료와 비물리적인 정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들의 이원론적 인식체계를 전복시킨다. 흥미롭게도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 기계, 사이보그의 경계를 만들어낸 테크놀로지가 시간이 흐르면서 역으로 그들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장치가 되었다.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이 하나로 이어 붙여 그려낸 이승민의 프란켄슈타인을 보고 사람들은 괴물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이보그란 타자가 탄생시켰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이 알고 있던 타자에 대한 개념은 해체되었다. 익숙했던 인식의 대상이었던 신체의 문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미래의 질서를 미리 구성해 보려는 반복된 시도가 결국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승민의 그림은 그런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대형 (대표, Hz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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