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22/29일은 휴관입니다.


결의 언어
캔버스는 사각의 틀에 실과 실이 촘촘하게 교차시켜 만들어낸 평면이다. 회화는, 이러한 물리적인 조건으로 형성된 평면 위에 살고 죽는다. ‘그리기’란 결국 평면 위에 환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것을 지워나가는 과정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홍지, 차승언, 박성연은 캔버스를 이루는 기저물질, ‘실’, ‘섬유’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실은 환영을 위한 매체 혹은 수단이 아닌 물질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들의 작업에서 실과실이 서로 몸을 껴안아 만드어내는 결은 불안정한 환영이 되고 오브제가 되고 일상의 허물이 된다.

홍지는 실을 감고 채색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풀어서 다시 감는 과정을 반복한다. 캔버스의 프레임은 평면의 조건이 아니라, 실을 지탱하는 지지대가 된다. 채색된 실을 풀어 다시 감는 과정에서 수행자의 움직임과실의 탄성으로 채색된 면의 모양이 왜곡된다. 색을 받아들이고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면의 일이나 풀고 감기는 것은 선의 일인 것이다. 프레임에 감긴 한 올 한 올의 실들은 고유의 색상과 움직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캔버스 위에 희미하게나마 환영을 만들어 낸다. 실들의 결은 느슨한 듯 촘촘하다. 서로 무심한 듯 긴밀하다. 이렇게 캔버스에 감긴 실들은 연을 맺고 있는 듯하면서도 개별적으로 온전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미술을 전공한 홍지의 작업 속에 불화의 도상들은 제거되었지만 반복적인 행위의 신성함과 경건함이 결과 결 사이에 내밀하게 잔재하고 있다.

홍지의 작업이 실을 캔버스에 감아 그 프레임의 모양과 크기에 형태가 따르는 방식이라면, 차승언은 프레임을 노출시키거나 혹은 벗어남으로써 캔버스를 오브제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기’에 목적을 두었다면캔버스의 프레임이나 표면의 짜임은 존재하나 망각되야 하는 물질이고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한 중성적인 공간으로 파악하야 한다. 그러나 차승언은 캔버스에 주목한다. 사실 캔버스는 나무 틀과 직조물로 구성된하나의 결과물이다. 차승언의 이런 관점에는 섬유미술을 전공했던 작가의 경험과 연결된다. 저 멀리 탈주하려 했던 경험이 캔버스 앞에서 다시 환기되는 것이다.

베틀로 직조하여 만들어낸 캔버스의 표면은 촘촘하게 짜이다가 어느 지점에서 길게 늘어지거나 또 다른 캔버스가 개입하여 서로 연결되어 버리고 만다. 축 늘어진 실들의 결은 캔버스의 물리적 성격을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차승언의 작업이 캔버스에서 출발하나 오브제로 점철되는 것은 이렇게 오롯이 드러나는 ‘실들의 결’과 ‘노출된 프레임’ 때문일 것이다.

일상적인 행동/습관이나 소리를 소재로 작업하는 박성연은 실을 이용하여 창문, 문과 문고리, 가구의 일부분을 재현한다. 사실 우리의 삶이란 ‘일상적이다’와 ‘일상에서 벗어난’이라는 두 표현 사이에서 시소처럼 불안전하게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 ‘일상적인’ 행동과 소리를 포착하여 전시장에 투사하는 일은 오히려 낯설고 생경하다. 문을 열고 닫기,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오르거나 내리기,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기처럼 반복적인 행동을 만들어내는 대상들이 털실로 짜여져 공간을 채운다. 털실의 촘촘한 결들은 실제의 오브제를 반영하면서도 실의 유연한 성격으로 인해 마치 대상의 허물, 일상의 허물처럼 나타나 공간을부유한다. ‘결’의 의미가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바탕의 상태나 무늬라면 일상적인 행동/말/소리들은 우리의 시공간을 채우는 결들이다. 박성연은 제한된 캔버스의 틀을 넘어 공간-시간-사람 사이의 결을 재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결은 일정한 행동이나 현상이 반복적으로 이뤄질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결은 촘촘하고 견고하면서도 느슨하고 유연하다. 또한 수행자가 몸을 쓰는 수고와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결과물이자 켜켜이 쌓인수고와 시간의 경로다. 지나온 길이다. 홍지, 차승언, 박성연은 실과 그것이 만들어낸 결을 보여주지만 작업의 시작과 끝이 상이하다. 켜켜이 쌓인 수고와 시간의 경로가 다른 것이다. 지나온 길이 다른 것이다.

전수연(Hzone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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